[서울=뉴스핌] 방보경 노연경 기자 = '헤어지자'는 말에 계획적으로 여자친구를 유인해 살인한 혐의를 받는 의대생 사건이 알려지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일각에선 '수능 만점', '의대생'이란 특이점이 없었다면 단순 교제폭력 사건만으론 이처럼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교제폭력에 대한 심각성이 그만큼 사회적으로 논의된 지 오래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17일 뉴스핌 취재에 따르면 지난 2016년 국회에서 교제폭력 법안이 발의되기 전부터 법조계에서는 교제폭력의 특성을 형량에 고려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 "교제폭력 고려 엄중 처벌" 건수 해마다 줄어

2015년 8월 광주지방법원은 '데이트폭력이라는 신조어가 상징하듯 연인관계에 있는 이성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적지 않게 문제 됐다'고 판시했다.

관련 사건은 2015년 9월 남자친구가 연인을 살해해 유기한 사건보다 앞선 2015년 4월에 일어났다. 당시 가해자는 피해자를 만지려다 거절당해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 벽에 10회가량 부딪히게 하고, 피해자의 뺨과 머리 등을 30회가량 때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에도 데이트폭력의 특성을 고려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판시한 판결은 약 164건으로 집계됐다. 이 건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특수한 관계로 범행이 장기간 지속되거나 행위의 위험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상당한 수준의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야기하게 되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표현이 담긴 판결문만 추린 결과다.

문제는 교제폭력을 양형에 고려하는 것은 오로지 판사의 재량이라는 점이다. 대법원 소속 양형위원회에서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양형기준표'에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양형기준표는 폭력범죄에서의 가중요소를 '불특정 또는 다수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할 경우', '존속인 피해자',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 정도로만 들고 있다.

논의가 지지부진해지면서 교제폭력을 불리한 정상으로 언급한 판시는 해를 거듭할수록 줄고 있다. 교제폭력이 공론화되고, 법제화 움직임이 생겼던 2020년, 2021년도에 교제폭력을 양형에 고려한 판결은 각각 30건, 40건에 달했다. 하지만 그 수는 점차 줄어 2022년에는 27건, 2023년에는 17건으로 줄었다.

이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특수한 관계를 양형 기준에 공식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근무하는 이도경 변호사는 "성폭력범죄에서도 아는 사이나 신뢰관계에 기반한 사이일 경우 양형 가중 요소로 반영돼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전했다.

◆ "교제폭력, 별도 법안 제정 또는 기존 법률 개정돼야"

일각에서는 더 나아가 교제폭력을 다루는 별도의 법안이 제정되거나, 기존의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는 별도의 법이 없어 교제폭력 가해자들은 일반적인 형법 조항(폭행 상해)으로 처벌받고 있다. '교제'라는 개념이 포괄적이어서 스토킹처벌법이나 가정폭력법로 규율되지 않기도 한다. 교제폭력 법안은 지난 2016년 20대 국회에서부터 21대 국회까지 지속적으로 발의됐지만, 단 한 번도 통과되지 못했다.

실제로 교제폭력은 가정폭력과 유사하게 피해자와 가까운 사이에 있는 가족에게도 피해가 미친다. 이별을 통보하러 찾아온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그 모친까지 중상을 입힌 '김레아 사건'처럼 교제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범죄인 만큼 주변 사람도 위험에 노출된다.

뉴스핌이 교제폭력 관련 최근 판결문 100건을 분석한 결과 가족까지 피해를 입어 실형이 선고된 사례가 확인됐다. 2020년 8월, A씨는 당시 교제하던 B씨와 휴식을 취하던 도중 성기를 만지라는 강요를 받았다. A씨는 7살 딸이 옆에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B씨는 A씨의 왼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B씨의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이후 A씨 몰래 딸에게 접근해 5번이나 성기를 주무르게 한 것이었다. 교제폭력이 미성년자 강제추행으로 나아간 만큼 형량은 셌다. 해당 사건은 원심에서 징역 4년을, 항소심에서는 5년을 받았다.

장애가 있는 피해자의 아들까지 때린 C씨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총 다섯 명의 여자친구를 폭행하거나 식칼로 위협하고 여자친구의 고모까지 때린 D씨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전문가들은 그루밍 범죄나 스토킹 처벌법처럼 '충격적인 사건' 이후 제도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김레아와 의대생이 연인을 살해한 이후 교제폭력이 공론화되고 있는 것처럼 엽기적이거나 심각한 범행이 일어나지 전에 교제폭력 문제를 제도화·법제화해 범죄를 예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도경 변호사는 "아동청소년 온라인 그루밍 범죄가 신설된 게 N번방 이후였고 스토킹 처벌법이 입법된 이유도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라며 "사회적으로 분노할 만한 사건이 있어야 변화되는 부분이 답답하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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