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중국 공산당의 진짜 경쟁력은 세계 2위권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역사 기억이다. 박물관과 유적지들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겪은 근대의 수모와 치욕을 기억하자고 군중들을 부단히 각성시킨다.

베이징 서북쪽의 청나라 황실정원 원명원에 가면 8개 서방 연합국의 약탈 방화에 의해 폐허가 된 파괴 현장이 살아있는 역사 교육 박물관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서방 침탈국들의 야만과 무도함을 고발하고 중국이 왜 단합하고 강해져야 하는지를 일깨우기 위함이다.

아편전쟁 후 일본에 의해 손가락질받았던 '동아병부(东亚病夫, 아시아 의 병자)'라는 조롱도 중국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봉건 세력 및 군벌의 횡포, 일본 및 서구 열강의 침탈에 짓밟히고 유린당한 나라를 구하는 데 있어 사회주의 도입과 공산당 창당은 중국 역사의 필연이었다고 중국은 목청을 높인다.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기억하자(不忘初心牢记使命)'는 구호가 중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친다. 

공산당은 선전 선동 프로파간다에 능한 정치집단이다. 미중 충돌이 본격화한 이후 필자는 중국의 홍색 루트를 다니며 공산당 유적지와 박물관을 돌아봤다. '역사 화폐 혁명 올림픽 교통 군사 천문 영화 경극 고시 음악.' 장르 불문하고 온 나라에 중국만큼 박물관과 기념관, 전람관, 혁명 유적지가 많은 나라도 드물다. 

난징 대학살 기념박물관, 베이징 화폐 박물관과 군사 박물관, 베이징 공산당 100주년 전람관, 푸젠성 취안저우 교통역사 박물관, 옌안의 미디어박물관, 광저우 농민공 박물관, 산둥성 취푸의 유교 대학박물관. 2024년 5월 현재 중국엔 박물관이  모두 6565개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치로 동네 마다 몇걸음만 걸으면 박물관에 닿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베이징 올림픽공원 옆 공산당역사전람관에 한국전쟁(중국명 항미원조 전쟁) 당시 북한 노동당 중앙위회 김일성과 박헌영이 공산당 마오쩌둥 주석에게 보낸 1950년 10월 1일 자 군사지원 요청 서신이 전시돼 있다.  사진=뉴스핌 촬영.    2024.05.20 chk@newspim.com

 

박물관은 학생들의 교실 밖 야외 학습장이며 체제 구성원들을 위한 사회 교육 현장이다.  테마는 다르지만 중국 공산당이 박물관을 통해 인민들을 각성키는 것은 철저한 역사 기억이다.  과거의 일을 잊는 순간 오욕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가르치고  '역사의 망각은 패망의 지름길이라고 국민들을 일깨운다.    

난징 대학살 박물관은 일본에 의해 자행된 30만 명 민간인 대학살의 끔찍한 참상을 전시하고 있다. 중국  영화 '난징 난징 난징'은 일제 침략과 일본군의 소름 끼치는 만행을 고발한다. 생생해지는 난징 대학살의 기억 속에 어제의 '중일전쟁'이 마치 현재 진행형 처럼 느껴진다.

중일 관계가 '얼음을 깨는 여행(破冰之旅)'에 비유될 만큼 호전되도 난징대학살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기억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다. 중국은 회개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며 또다시 실패를 자초하지 않기 위한 자기 각성이라고 설명한다. 중국 공산당은 '우리가 강한 이유는 역사를 바로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베이징 하이덴구의 공산당 전람관은 '창당 100년의 휘황한 역사'를 전시해 놓은 곳이다. 이곳에 가면 한국전쟁 때 김일성과 박헌영이 마오쩌둥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한 한글 서신과 중문 번역본이 전시돼 있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라고 부르면서 평화 수호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화폐 박물관이든 군사 박물관이든 어디를 가나 항미원조가 미국 제국주의와 싸운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교 이후 한중 관계가 허니문이었을 때도 시퍼렇게 날 선 중국의 이런 역사 인식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중국은 신냉전 기류 속에 맞은 창당 100주년 기간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 등 숱한 한국전쟁 드라마와 영화를 방영했다. 중국에겐 '승리의 전쟁'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겠지만 우리에겐 하나같이 상처를 들쑤시는 뼈아픈 내용들이다.

서울= 최헌규 중국전문기자(전 베이징특파원) chk@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