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뉴스핌] 정성훈 기자 = 고용노동부가 1988년 '최저임금 제도' 도입 이후 수십년간 고착화된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전면 손질하기로 했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최저임금법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노사 갈등만 증폭시킨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다만 정부는 이번 개편 논의과정에 신중을 기할 방침이다. 앞서 한 차례 실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용부는 지난 2019년 최저임금 '결정체계 이원화'를 주요 골자로 하는 개편안을 발표한 바 있지만, 노사 양측의 거센 반발에 막혀 국회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전문가들은 최저임금 개편방안으로 크게 결정구조 및 결정기준을 손봐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그동안 정권 입맛에 따라 최저임금 인상률이 등락을 거듭했던 만큼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예측 가능한 결정기준 산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정부 주도의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주장하기도 한다. 정부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최저임금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책임도 감수하는 구조다.  

◆ 정부, 1988년 최저임금 첫 도입 후 40년 만에 손질

23일 최저임금위원회와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고용부는 내년 최저임금 고시(8월 5일) 이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논의체를 구성해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을 위한 본격 논의에 착수할 예정이다.  

[세종=뉴스핌] 정성훈 기자 = 이인재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장(가운데)이 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최임위 제2차 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06.04 jsh@newspim.com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 필요성은 내년 최저임금 결정 직후 최임위 내부에서 촉발됐다. 이인재 최임위 위원장은 내년 최저임금 수준 논의를 위한 올해 첫 번째 전원회의에서 노사 합의에 의한 결정을 약속했다.

하지만 서로 간 입장만 확인하다 노사 합의는 불발됐고, 공익위원이 정한 '심의촉진 구간' 내에서 노사가 희망하는 수준을 정해 최임위 위원 27명(노·사·공 각각 9명씩) 전원이 투표하는 방식으로 결정됐다.

이인재 최임위 위원장은 지난 12일 내년 최저임금을 '시급 1만30원'으로 결정한 직후 간담회를 갖고 "지금의 최저임금 결정 시스템으로는 합리적 생산적인 논의가 진전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면서 "고용부를 중심으로 제도개편에 대해 심층 논의와 후속조치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최임위 위원장이 공식석상에서 최저임금 제도개편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이정식 고용부 장관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장관은 사흘뒤인 지난 15일 최저임금 제도개선 관련 입장문을 내고 "국가의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과정이 마치 개별 기업의 노사가 임금 협상을 하듯 진행돼 소모적 갈등과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며 "이에 최저임금 결정구조, 결정기준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돼 왔고 이를 반영해 본격적인 제도와 운영방식 개선 논의를 시작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저임금 고시 이후 전문가와 현장 등이 참여하는 논의체를 구성해 저임금 근로자와 영세 소상공인의 어려움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심도있게 고민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이 이뤄진다면, 1988년 최저임금 제도 도입 이후 40여년 만이다. 그동안 최저임금 결정구조 및 결정기준을 놓고 비판이 쏟아졌지만, 개편 논의는 진부했다. 더욱이 매년 최저임금 논의 과정에서 노사 합의를 전제로 했지만, 1988년 제도 도입 이후 노사 합의로 결정된 건 7번에 불과하다. 최근 몇 년간은 노사 합의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사간 대립이 치열했다.  

다만 정부는 이번 개편 과정에 어느 때보다 신중을 기할 방침이다. 결정방식 및 결정기준 등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을 위해서는 '최저임금법' 개정이 필요한데, 여야 간 대립 구도가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정부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내년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업종별 차등적용 여부를 놓고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황이라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다. 

[세종=뉴스핌] 정성훈 기자 =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최저임금위원회 제10차 전원회의가 열리고 있다. 2024.07.11 jsh@newspim.com

더욱이 고용부는 지난 2019년 문재인 정부 당시 이미 한 차례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을 추진하다 실패한 경험이 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구간설정위원회'와 '결정위원회'로 이원화하고, 최저임금 결정기준에 '고용·경제상황'을 추가하는 개편 최종안을 발표했다.   

결정체계 이원화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구간설정위가 최저임금 심의구간(상·하한선)을 설정해 주면 노·사·공익위원이 참여한 결정위에서 최저임금을 정하는 방식이다. 또 결정 기준 개편안은 현행 최저임금 결정기준에 '고용에 미치는 영향, 경제성장률 포함 경제상황'을 추가했다.  

◆ 전문가들 "명확한 결정기준 필요… 정부가 최종 결정하고 책임져야"  

전문가들은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 과정에서 명확한 결정기준 설정, 정부 주도의 결정 체계 필요성을 강조한다.

우선 최저임금 결정기준과 관련해 보다 명확한 결정 기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법적 기준에는 ▲근로자의 생계비 ▲유사 근로자 임금 ▲소득분배율 ▲노동생산성 등이 있지만, 법적 기준을 제대로 반영해 최저임금을 결정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최근 몇 년간은 '국민경제생산성 상승률(경제 성장률+소비자 물가 상승률-취업자 증가율)을 구하는 산식에 따라 최저임금을 결정해 왔다. 내년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도 공익위원들은 경제성장률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더한 뒤 취업자 증가율을 뺀 4.4%(2.6%+2.6%-0.8%) 이내에서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만 해당 지표를 최저임금 산식으로 적용하는 이유, 특히 취업자 증가율과 최저임금 간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오계택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현재의 최저임금 결정 기준은 모호한 측면이 많아 매번 회의 때마다 명확한 기준을 정하기 힘들고, 최저임금을 결정한 뒤에도 뒷말이 무성했다"면서 "법에 명시한 법적기준을 좀 더 구체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뉴스핌] 정성훈 기자 = 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최저임금위원회 제9차 전원회의가 열리고 있다. 2024.07.09 jsh@newspim.com2024.07.09 jsh@newspim.com

다수의 전문가는 최저임금 결정기준에 기업의 '노동생산성' 측면을 좀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생산성 증가율을 넘어서는 최저임금 상승률이 결정된다면, 기업의 존립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허재준 노동연구원장은 "경제학 측면에서 노동생산성 증가율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최저임금을 정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면서 "다만 최근 빈곤가구, 1인 가구 증가 등 사회인구학적으로 옛날하고 달라진 측면이 있기에 이런 부분들을 보완해 나갈 필요는 있다"고 설명했다.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저임금위 공익위원들은 노사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경제성장률, 소비자물가상승률, 취업자증가율 등을 고려해 임금수준을 결정하고 있는 상황인데, 일반 노동자가 기업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서 "최저임금의 합리적 결정을 위해서는 생산성과 사업주의 지불능력에 대한 고려가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최저임금 결정방식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임위는 노동계를 대표하는 근로자위원 경영계를 대표하는 사용자위원, 사실상 정부를 대변하는 공익위원 각각 9명씩 총 27명으로 구성된다. 노사 합의를 기본으로 하지만, 사실상은 공익위원이 정한 심의촉진 구간, 권고안 내에서 최저임금이 결정된다. 고용부 장관이 공익위원 9명 전원을 임명하다 보니, 정부 성향과 정책방향에 따라 최저임금 수준도 영향을 받게 된다. 

이에 전문가들은 소수 정예의 전문가 집단을 구성해 보다 집중적이고 생산적인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처럼 노사가 직접 참여하는 순간 대립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져 진정한 최저임금 논의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전문가 논의 과정에서 취약계층 및 업종들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도록 철저한 사전조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허 원장은 "최저임금은 노사관계 전문가가 참여해서 결정하기보다, 거시경제 전문가와 노동시장 전문가 등 노동 현실을 잘아는 전문가들이 참여해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전문가들이 낸 의견을 정부를 대변하는 공익위원들이 판단해 결정하면서 정부의 책무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최저임금 결정과정에서) 상반기 임금 관련 통계를 촘촘하게 조사하고, 최저생계비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는 근로자와 고용의 81%를 책임지고 있는 중소기업·소상공인, 기업인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최저임금 논의 기구를 고용부 산하가 아닌 국무총리실 산하로 이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위원회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한 취지다. 

이호선 국민대 법학과 교수는 "최저임금위원회가 고용부 산하에 있다 보니 노사 간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 전문적인 논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위원회 조직을 총리실 산하로 이관해 위원장을 총리가 겸하거나 상임위원이 맡도록 해 최저임금이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 교수는 최저임금 수준을 논의할 전문가 집단 구성 방안에 대해 "전문가 풀은 정부가 추천하면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우려가 있기에, 여야가 추천하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다"면서 "이들의 의견을 함께 참여한 공익위원들과 나누고 최종 결정은 공익위원들이 하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제안했다. 

jsh@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