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배정원 기자 = "실체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절차적 정의도 지켜져야 되는 것 아니냐며 수없이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재판을 하고 어떤 날은 야간재판까지 했습니다. 재판 기록 등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변론을 준비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12일 서울고법 형사7부(이재권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고(故)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내란목적 살인 등 재심청구 사건 심문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한 안동일 변호사는 이 같이 말했다. 안 변호사는 10·26 사건 재판 당시 김 전 부장의 변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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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부장은 지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전 경호실장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같은 해 12월 첫 재판이 열린지 16일 만에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항소심은 일주일 만에 끝났고, 이후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총 170일이 걸렸다.

변호인단은 "전체적으로 재판이 속전속결로 진행됐다"며 "재판을 받을 당시 김재규는 변호인 조력권을 침해받았고 피고인 방어권은 철저히 유린됐다"고 주장했다.

실제 김 전 부장의 1·2·3심 재판을 모두 지켜봤던 안 변호사는 "재판이 매일 진행되는 탓에 변론을 준비하기가 어려웠다. 재판 기록을 볼 수 없어 검열에 의해 보도된 신문자료를 보고 변론을 준비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안 변호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판조서를 보게 해달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최후변론 직전까지 공판조서를 보지 못해서 결심을 늦춰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피고인 접견도 자유롭지 않았다고 했다. 안 변호사는 "1심 4차 공판기일 때 김재규의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되면서 처음 접견했다. 당시 얼굴이랑 목덜미에는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고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저는 그런 고문방법이 있는지 그때 처음 들었다"고 증언했다.

재판 과정에서의 불법행위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합동수사본부 측이 실시간으로 재판 상황을 듣고 있다가 무언가 지시할 사항이 있으면 재판부에 쪽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재판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안 변호사는 실제로 재판부가 쪽지를 받으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변호인의 말을 끊고 휴정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안 변호사는 "재판이 잠깐 휴정한 동안 제가 법무감 집무실에 불려간 적 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담배연기가 자욱한 방이었다. 법무감 자리에는 남 장관이라는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가 '국선 변호인이 왜 이렇게 열심히 해'라고 묻자 저는 '열심히 하는게 무슨 잘못입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남 장관이 '너 손 좀 봐야겠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그렇게 몇 마디 오고가는데 집무실 스피커에서 '개정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렸고 저를 밀면서 빨리 법정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때 '재판 상황이 법무감 집무실에 중계되면 이걸 듣고 모니터링해서 쪽지를 보내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오는 7월 12일 안 변호사에 대한 추가 신문과 함께 심문기일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앞서 김 전 부장의 유가족은 지난 2020년 "당시 신군부의 불법적인 개입으로 재판이 정당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새로운 증거가 나왔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김 전 부장의 여동생 김정숙 씨는 "재심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온 국민이 깊이 새겨보는 계기가 되고 김재규 장군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희망의 씨앗이 됐다는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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