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배정원 기자 = "최창일 씨는 50여 년 전 조국으로 건너와 꿈을 펼치려던 재일 한국인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간첩으로 기소돼 형이 확정되는 과정에는 중대한 인권 침해가 있었습니다.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할 사법부는 그 임무를 소홀히 했습니다.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1970년대 재일동포 간첩으로 지목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고(故) 최창일 씨가 50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13부(백강진 부장판사)는 2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씨의 재심사건에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뉴스핌] 배정원 기자 = 서울고법 형사13부(백강진 부장판사)는 2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았던 고(故) 최창일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2024.05.23 jeongwon1026@newspim.com

재일동포 2세인 최씨는 동경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한국에 건너왔다가 지난 1973년 육군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불법 구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당하고 간첩으로 몰렸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최씨는 지난 1974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가석방이 되기 전까지 약 6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최씨는 재일동포라는 차별과 함께 간첩이라는 낙인을 안고 큰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1998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최씨의 딸은 지난 2020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그로부터 약 4년 만인 지난 1월 재심 사건 첫 공판기일이 열렸다.

검찰은 최씨가 혐의를 자백한 사실이 있다며 수사기관에서의 진술과 법정 진술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최씨는 수사기관에서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진술했기 때문에 임의성이 없어 그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법정에서 한 진술 또한 수사기관에서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임의성 없이 이뤄진 진술이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법정 진술에 대한 증거능력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해 탈출했다는 점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고, 국가 기밀 누설의 점에 대해서는 그 대상이 된 정보가 국가 기밀이라고 인정하기 부족하다. 나머지 공소사실에 대해서도 충분한 증거가 없다"며 최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면서 이날 최씨를 대신해 법정에 출석한 최씨의 딸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백 부장판사는 "이 사건은 남북 분단이 빚어낸 이념 대립 속에서 한 사람의 지식인이자 성실한 대한민국의 국민, 그리고 가장이었던 최창일씨가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오늘 법원이 과거의 판결을 바로잡는다고 해서 고인과 가족들이 그동안 받았던 커다란 고통이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판결이 최창일씨와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치유의 의미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판결이 끝나고 취재진을 만난 최씨의 딸은 "오늘 판결로 가족들의 힘들었던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재판장님이 이런 유족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해주셔서 감사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유족을 대리한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검찰에는 재심 사건에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지 않으면 무분별한 항고를 하지 않도록 하는 매뉴얼이 있다. 이 사건에는 새로운 증거가 나올 것이 없다. 검찰의 매뉴얼대로면 상고를 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이라며 "오늘 재판장님께서 사법부의 일원으로 사과도 해주셨는데 이런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검찰이 상고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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